상업활동의 중심지로서, 유흥가로서 청계천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사람들을 한 마디로 말한다면 왈자(曰子) 들이었다.
왈자란 기술직 중인, 경아전(京衙前, 각사 서리, 대가의 겸종), 액예(掖隸, 대전별감, 무예별감), 군교(軍校, 포교 등 하급군인), 시전상인 등을 총칭하는 말이다. 이들은 상업이 번창한 서울 도심 부에서 술집과 기방을 주름잡던 중간계층이었다. 그리고 기방에서 이들을 상대하는 기생 또한 청계천에서 활동 하고 있는 주요 구성원이었다. 왈자들은 직업에 따라 각각 거주지역을 달리하였다.
상류에서부터 지역별로 거주 하고 있는 청계천 사람들을 살펴보면 우선 광통교를 중심으로 상류 '우대'에는 각 관아에 소속된 서리 등 경아전들이 거주하였으며, 장통교, 수표교 어름의 중촌에는 중인들이, 효경교 아래 아래대에는 군교(軍校)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우대, 즉 상촌(上村)에 살고 있는 경아전의 대표적인 부류는 서리(胥吏)들이었다. 이들은 육조, 한성부, 비변사, 선혜청, 내수사 등 관아에 소속되어 문서의 처리, 등사(謄寫), 업무연락을 맡거나, 고급관리나 종친의 심부름을 하였다. 이들은 해당 관아의 실무담당자로서 전문적인 식견을 가지고 실용서를 편찬하기도 하였으며, 나아가 시문(詩文)을 익혀 양반사대부 계층과 교유하기도 하였다. 또한 직임(職任)을 이용하여 권력과 부를 누렸으며, 한편으로는 협객(俠客)이 되어 시전 상인들과 함께, 술집과 기방, 도박장 등 유흥가를 휩쓸고 다녔다.
광통교 부근의 다동·상사동은 상업활동의 중심지로서 시전의 상인들이 살았다. 오늘날 청계천이 도심산업의 중심지로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지만, 조선시대에도 청계천 주변은 상업과 수공업의 중심지였다. 따라서 청계천 주변에 상인들이 많이 거주하게 된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상인들은 사람들이 통행하는 거리 쪽 으로는 점포를 내고, 그 뒤쪽에는 자신들이 거주하는 살림집을 마련하였다. 상인들 또한 조선후기 상권의 독점, 중국·왜와의 중개무역을 통하여 상당한 부를 축적하였으며, 이러한 부를 바탕으로 권세 있는 양반들과 어울리며, 매우 호사스러운 생활을 하였다. 시전상인들은 서린동과 다동(茶洞) 일대와 상사동(想思洞, 지금의 청진동과 종로 1가 사이) 일대에 특히 많이 거주하였다.
시전 상인들은 신분상으로도 다른 지방의 상인들과는 달리 특권을 누리고 있었다. 원래 사농공상(士農工商)이라는 조선시대의 신분체계로 볼 때 상인은 가장 아래에 있었다. 그러나 서울에 살고 있는 시정상인만은 경아전과 같은 중인의 지위에 있었으며, 실제 상업적인 부를 기반으로 경아전이 되기도 하였다.
상업과 수공업의 중심지로서 물품의 거래가 활발하고,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였던 청계천 지역은 자연 도성내의 대표적인 유흥가가 되었다. 특히 조선후기 서울은 상공업의 발달에 따라 소비적 유흥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주사(酒肆, 술집)와 기방(妓房)이 번창하고 도박 따위가 성행했던 것이다. 길거리 곳곳에는 주막 깃발이 펄럭이고, 술과 매음을 영업종목으로 하는 색주가(色酒家)가 성업 중이었다. 속칭 '군칠(君七)이집'이라 불리는 한 술집은 평양의 냉면, 개성의 산적 따위를 팔았고, 밤에는 주등(酒燈)을 켜놓고 영업을 하였다고 한다. 다동, 상사동 지역은 지금의 청진동과 서린동(남)이 기방촌(妓房村)의 중심지였다.
이곳에 색주가(色酒家)가 형성될 수 있었던 것은 이들 상인들을 중심으로 한 소비층이 두텁게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기 방에서 활동하고 있는 중심 그룹은 당연히 기녀들이었다. 이들은 오늘날로 말하자면 전문직업인이었다. 이들은 신분상으로는 노비와 같은 천인이었으나 이들이 상대하는 남자는 왕족이나 고위 관료에서부터 하급관리, 시전상인 등에 이르기까지 매우 광범위하였다. 기녀들은 남자들은 접대하는 직업의 성격상 아름다운 용모는 물론, 가무와 시문에도 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