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광통교를 중심으로 한 청계천 주변과 정릉동(지금의 중구 정동), 육조거리(지금의 세종로) 앞에는 책사(冊肆), 서화사(書畵肆) 등 서적과 그림을 판매하는 가게들이 즐비하였다.
1800년대 중반 서울의 풍물을 노래한 「한양가」에는 광통교 주변의 서화사의 풍경을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광통교 아래 가게 각색(各色) 그림 걸렸구나 / 보기좋은 병풍차(屛風次)에 백자도(百子圖) 요지연(瑤池宴)과 / 곽분양행락도(郭汾陽行樂圖)며, 강남(江南)금릉(金陵)경직도(耕織圖)며 / 한가한 소상팔경(蘇湘八景) 산수도(山水圖)도 기이하다.
광통교를 중심으로 한 청계천 주변 지역에서는 방각본(坊刻本)이라고 하여 판매를 목적으로 하는 서적의 간행이 활발하게 이루어 졌다.
방각본은 주로 민간이나 상인들에 의하여 간행되었으며, 주변에 있는 서사나 서화사를 통하여 유통되었다. 예를 들면 민속학자 고 송석하(宋錫夏, 1904∼1948) 선생이 소장하였던 「고사촬요(攷事撮要)」 라고 하는 책 끝에는 만력(萬曆) 4년(1576) 7월이라는 시기와 함께 "수표교 아래 북변에 살고 있는 하한수(河漢水) 집에서 판각하였으니 살 사람은 찾아 오라"고 하는 광고까지 낼 정도로 활발하였다.
방각본을 간행하는 곳은 종이를 생산하는 자하문 밖의 조지서(造紙署) 부근과 남대문밖의 자암(紫巖), 야동(冶洞), 성균관 근처의 송동(宋洞)에도 있었지만, 주로 청계천 주변지역에 밀집해 있었다. 무교(武橋), 유동(由洞), 미동(美洞), 합동(蛤洞), 광교(廣橋), 동현(銅峴), 모교(毛橋), 효경교(孝經橋) 등이 그 대표적인 지역이었다. 여기에 서 간행된 서적의 종류를 보면, 「천자문」,「동몽선습」, 「명심보감」, 「통감절요」, 「옥편」,「운서」 등 기초 학습서와 「숙향전」, 「심청전」, 「금방울전」 등 한글소설들로 주로 서당과 부녀자들을 중심으로 한 일반 서민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한편 서울 저자거리 곳곳에서는 방각본 소설책을 읽어주는 전기수(傳奇, 기이한 이야기를 전해주 는 노인이라는 뜻)라고 불리는 이야기꾼들이 있었다. 전기수는 동대문에서 종루 사이를 6일간격으로 오르내리면서 청중에 둘러 싸여 매일 소설을 구연(口演)하였다. 그가 소설을 읽다가 아주 긴박한 대목에서 읽기를 뚝 그치면 청중은 다음 부분이 궁금하여 다투어 돈을 던졌다고 한다.
일반 서민을 위한 방각본의 간행과 유통, 전기수와 같은 전문 이야기꾼의 등장은 그 동안 양반 사대부들 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지식의 일반 대중화에 크게 기여하였다. 시전 상업의 중심지로서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였던 청계천 주변지역은 바로 그 중심에 있었다. 지식대중화의 중심지로서 청계천의 명맥은 조선말기와 근대로 이어졌다.
우리 나라 최초의 근대식 인쇄소인 박문국(博文局)이 청계천 주변인 을지로 2가에 자리하고 있었으며, 회동서관(東書館)과 광문회(光文會)와 같은 서점들이 광통교 주변에는 자리하고 있었다.
회동서관은 1897년 고유상(高裕相)이 자본금 15만원을 투입하여 광통교 주변(지금의 조흥은행 본점 옆)에 설립하였다. 회동서관은 신소설, 사전, 실용서 등의 출판과 판매를 겸하였으며, 단순히 책만을 취급한 것이 아니고, 학생들에게 필요한 학용품 등도 함께 취급하였다.
조선광문회는 청계천 본류와 남산동에서 내려오는 물길이 만나는 곡교(曲橋) 부근에 위치하였다. 1910년 일제는 조선을 강점한 후 해마다 진귀한 서적과 국보급 문화재를 반출하였다. 이에 충격을 받은 최남선(崔南善), 현채 (玄采)·박은식(朴殷植) 등은 조선광문회를 조직하고 우리 고전의 보존과 간행, 보급운동에 힘씀으로써 국학의 계승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