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의 도시, 물의 도시, 서울에는 다리 또한 많았다. 옛 서울지도를 살펴보면 물길과 도로가 만나는 곳곳에 다리가 표시되어 있다. 비교적 다리가 풍부하게 표시된 「수선총도」에는 약 190여개의 다리가 표시되어 있다. 이 중에서 명칭과 위치가 확인되는 것만 약 80개 정도이며, 1760년 영조 임금의 준천당시에 청계천 본류에는 모전교, 광통교, 장통교, 수표교, 하량교, 효경교, 마전교, 오간수문, 영도교 등 9개의 다리가 있었다.
① 모전교 : 모전〔隅廛〕 부근에 있었으므로 모전교라고 하였다. 모전은 각종 과일을 파는 가게를 말하는데, 큰 길 모퉁이에 설치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었다. 모전교라고 이름한 것은 이 다리가 모전 부근에 있었기 때문이다. 현재 중구 서린동 무교동 사거리 지점이다.
② 광통교 : 광통교는 육조거리-운종가-숭례문으로 이어지는 도성 안 중심통로였으며, 주변에 시전이 위치 하고 있어 도성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던 다리였다. 1958년 청계천 복개와 함께 도로 밑에 묻혔다. 현재 광교네거리 지하에 남아 있다.
③ 장통교 : 중부 장통방에 있었으므로 장통교라고 하였다. 현재 장교동 한화빌딩 앞에 위치하였다. 장통교는 청계천 본류와 남산에서 내려오는 물길이 만나는 지점에 있었다.
④ 수표교 : 광통교와 함께 가장 유명한 다리로 1420년(세종2)에 만들어졌다. 당시 이곳에 마전(馬廛)이 있어서 마전교라 불렀으나, 1441년(세종 23)에 다리 옆에 개천의 수위를 측정 하기 위해서 수표석(水標石)을 세운 이후 수표교라고 하였다. 1959년 청계천 복개공사 때 장충단공 원으로 옮겨 보존하고 있다.
⑤ 하랑교 : 부근에 하랑위(河浪尉)의 집이 있었기 때문에 하랑교라고 불렀다. 일제강점기 때 콘크리트 다리로 개축되었다. 현재 청계 3가 센츄럴 호텔지점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⑥ 효경교 : 부근에 소경이 많이 살았다 하여 '맹교(盲橋)', '소경다리'라고도 불렀다. 현재 세운상가 옆 아세아 전자상가 동편에 있었다.
⑦ 마전교 : 다리 부근에 우마를 매매하는 마전 (馬廛)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현재 청계 5가 사거리 동쪽 방산시장 앞으로 추정된다.
⑧ 오간수문 : 오간수문은 청계천 물이 성밖으로 빠져나가도록 하기 위하여 성벽 아래에 설치한 수문 (水門)으로 이것이 다섯개 있었으므로 오간수문이라고 하였다. 다만 성벽을 지키거나 수문을 관리하기 위하여 그 앞에 긴 돌을 놓아 다리의 기능을 병행하도록 하였다. 1908년 일제에 의해 파괴되고 다리가 놓여졌으며, 이때부터 오간수교(五間水橋)라고 불렀다.
⑨ 영도교 : 조선 성종 때 승려가 놓았다고 전한다. 흥인지문 밖에 있는 동묘(東廟)와 왕십리를 연결하는 통로였다. 고종초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수할 때 헐어다가 석재로 사용하였으며, 일제강점기 콘크리트 다리로 개축되었다. 현재 성동기계공고 옆 영미교길 부근에 있었다.
전통사회에서 다리는 단순히 물을 건너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서울사람들의 생활문화 속에 깊숙이 자리하고 있었다. 마땅한 공공장소가 없었던 시절, 다리는 약속과 모임의 장소였고, 길 가던 사람들이 쉬어 가는 쉼터이기도 하였다. 다리가 있음으로 인하여 동네 이름이 생겨나기도 하였으며, 반대로 부근 동네 이름을 따서 다리에 붙이기도 하였다. 다리에서 여러 사람들이 함께 할 수 있는 놀이가 생겨났으며, 웃음과 지혜가 담겨있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생겨나기도 하였다. 청계천의 옛 다리들은 도성의 다른 곳에 놓여 있던 다리보다 비교적 크고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갔다.
그런 만큼 청계천의 옛 다리들은 저마다 많은 이야기들을 담고 있으며, 청계천의 중요한 문화적 유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