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산은 자연적으로 생긴 산이 아니라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산으로 조산(造山)이라고도 한다.
가산을 만드는 이유는 자연경관을 일상 생활공간 주변에 가까이 두고 즐기고자 하는 옛사람들의 바람에서 비롯되었으며, 궁궐이나 도성 안에 큰 연못이나 하천을 조성할 때 파낸 흙이 쌓여 인공 산인 가산이 되기도 하였다. 경복궁 교태전 뒷산인 아미산(峨嵋山)이나 경회루 연못 가운데 있는 섬이 그 예이다.
또 풍수학적으로는 땅의 기운이 허한 곳에 지기(地氣)를 북돋우기 위하여 가산을 만들기도 하였다. 1398년에 종묘 앞쪽의 지세가 허하다고 하여서 흙으로 산을 쌓은 것이 그 예라고 할 수 있다.
청계천 주변에는 오간수문 안쪽에 가산이 있었는데, 하나는 개천 북쪽에, 하나는 개천 남쪽에 가산이 있었다.
이 가산은 1760년 영조 때 개천을 준설하면서 하천바닥에서 파낸 흙을 한곳에 모아 놓은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1760년 2월 개천 준설을 할 때 개천 바닥과 양 제방이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양의 토사가 하천 바닥에 쌓여 있었다. 그러나 하천 바닥에서 파낸 토사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에 대하여 특별한 계획을 세우지 못하고 있었다.
오늘날과 같은 운반수단이 없었던 당시로서는 엄청난 양의 토사를 멀리 옮기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였다.
따라서 하천 바닥에서 퍼낸 흙은 부근에 있는 낮은 가로에 쌓거나 질퍽한 큰 도로를 메우기도 하였으며, 빈터나 폐가를 매입하여 쌓기도 하는 등 형편에 따라 적당히 처리하는 정도였다.
그러나 준설이 끝날 무렵인 1760년 4월 영조는 당시 원로 대신인 유척기(兪拓基, 1691∼1767)에게 개천 준설공사의 성과를 묻게 되었다.
이때 유척기는 준설로 생긴 토사를 그냥 개천의 양안(兩岸)에 방치해 두면, 비가 올 때마다 쓸려 내려와 다시 개천을 메우게 되어, 모처럼 실시한 대역사가 헛되이 되어 버리므로 거액을 들여서라도 이 토사를 다른 곳으로 운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유척기의 지적에 따라 영조는 개천에서 준설한 수백만 석의 토사를 오간수문 부근 양안으로 옮겨서 쌓도록 하였다.
그 결과 개천 양안에 커다란 흙더미가 생겼는데, 이것이 가산이다. 마치 조그만한 꽃섬이었던 난지도가 1970년대 말부터 서울에서 발생하는 모든 쓰레기를 받아들이면서 높이 90m, 넓이 53만 평의 커다란 산이 되었던 것에 비교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때 만들어진 가산은 물론 난지도처럼 큰 규모는 아니었지만, 당시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산으로서는 상당히 컸다. 1770년 이후 발행된 고지도를 보면 오간수문 안쪽 개천 양편에 가산(假山) 또는 조산(造山)이라고 표기된 것을 볼 수 있다. 이렇게 만들어진 가산은 청계천 변에 살고 있는 거지들의 근거지가 되었다.
거지들은 가산에 토굴을 파고 생활하였으며, 그들의 우두머리인 꼭지단( 帥, 개수)을 이곳에서 선출하였다. 한편, 거지들에게는 뱀을 잡아 파는 권리가 부여되었는데, 뱀잡이를 땅꾼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이들이 가산에서 땅굴을 파고 살았기 때문이다.
가산은 특별히 기초를 다져서 쌓은 것이 아니라 그냥 흙은 한곳에 모아 놓은 곳에 불과하였으므로 비가 오면 조금씩 깎여 내려가기도 하였고, 반대로 개천을 준설할 때마다 토사가 다시 쌓이기를 반복하여 완만한 언덕을 이루게 되었다. 그리고 언제부터인지 가산에 나무와 화초를 심게 되었는데, 1914년에 서울의 지명을 새로 정할 때 가산에 심어놓은 꽃향기가 좋아서 이곳을 방산동(芳山洞)이라 이름하였다고 한다.
가산 역시 인구가 늘어나고, 근대적인 도시시설이 들어서면서 사라지게 되었다. 북쪽의 가산은 광무(光武) 2년(1898)에 그 자리에 전차 차고가 들어서면서 대부분 훼손되었으며, 남쪽 가산은 1918년경에 현 국립의료원 자리에 조선약학교(朝鮮藥學校)가 들어서고, 1921년에는 그 서편에 경성사범학교(京城師範學校)가 들어서면서 모두 헐렸으며, 그 흙은 종로의 도로 정비에 사용되었다고 한다. 현재 남쪽 가산터는 청계천 6가 평화시장 뒷골목에서 국립의료원을 거쳐 방산동 일대이고, 북쪽 가산터는 동대문 종합상가가 들어서 있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