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천은 도성 주변의 산과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들이 모여 도성 한가운데를 동으로 가로질러 흐르는 도심하천이었다. 조선시대에는 '개천(開川)'이라 불렀는데, 이것은 '내를 파내다'라는 뜻으로 청계천이 자연하천이 아니라 생활의 필요에 의하며 어느 정도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인공하천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청계천은 하천 조성과정이나 도시 한가운데에 자리하고 있다는 지리적인 위치 상 조선왕조 500년 동안, 근대 100년 동안의 서울의 역사문화, 서울사람들의 일상생활에 많은 영향을 주게된 것은 필연적이었다.
도심하천으로서 청계천이 자연스럽게 가지게 된 기능은 하수도로서의 기능이었다.
사실 수도 서울이 조선왕조 500년 동안 우리 나라 역사문화의 중심지로서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청계천이라는 거대한 하수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청계천으로 흘러 들어오는 지천을 통해서 서울 곳곳에 생명수가 전달될 수 있었으며, 반대로 서울 곳곳에서 버려지는 더러운 것이 청계천을 통해서 배설됨으로써 도시 전체가 깨끗하게 유지될 수 있었다. 한마디로 청계천은 수도 서울의 중요한 배설기관이었다.
청계천은 조선시대 역대 임금들이 왕정(王政)을 펼친 정치적인 공간이었다.
조선왕조의 기틀을 잡은 제3대 태종은 수도건설, 시전(市廛) 설치와 함께 개천을 정비함으로써 서울의 도시형태가 완성되었다.
제4대 세종은 개천으로 흘러 들어오는 지천을 정비하였으며, 개천에 흐르는 물의 깊이를 미리 헤아리기 위해 수표(水標)를 설치하였다. 무엇보다도 개천의 성격을 도심 속의 생활하천으로 규정함으로써 이후 개천이 서울사람들의 일상생활과 함께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조선후기에는 제21대 영조는 개천을 준설하고 정비하는 대대적인 역사를 일으켰다. 스스로 자신이 80평생 동안 한 3가지 일 중의 하나가 준천이라고 말할 정도로 개천의 준설과 정비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후 개천 준설작업은 영조의 준천을 표준으로 지속적으로 시행되었다.
일제강점기 청계천은 민족의 거리 종로와 일본인들의 마을 혼마찌(本町)을 구분짓는 경계가 되었으며, 지천을 시작으로 땅 밑으로 점차 묻혀지기 시작하였다. 1950년대를 전후하여 청계천은 빈곤과 불결의 상징으로 근대화, 산업화를 위하여 가장 먼저 풀어야할 과제였으며, 그 해법은 바로 복개였다.
1958년부터 본격적으로 복개되기 사작한 청계천은 1970년을 전후하여 완전히 사라지고 지금과 같은 복개도로와 고가도로의 모습으로 변하였다.
청계천은 서울의 도시형태를 구성하는 중심 축이었다. 청계천을 따라 동서로 가로지르는 도로가 생겨나고, 시전(市廛)이 형성되었다. 청계천은 북촌과 남촌을 구분하는 경계의 공간이기도 하였으며, 청계천 주변은 역관, 의관, 시전상인들이 주로 거주하는 지역, 즉 중촌(中村)이라고 하였다.
청계천은 서울사람들을 위한 공공의 놀이터였다. 명절 때마다 다리밟기, 연날리기, 연등행사, 편싸움(양쪽으로 편을 나누어 돌을 던지는 놀이, 石戰) 등 민속놀이가 펼쳐지는 장소였으며, 다리를 중심으로 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해학의 공간이었다.
청계천은 서울사람들의 생활공간의 일부분이었다. 아낙네들에게 유용한 빨래터였으며, 아이들에게는 개천 바닥이 말라있을 때는 공터로서, 물이 흐르고 있을 때는 멱감는 장소로 더할 수 없이 좋은 놀이터였다. 청계천은 가난한 사람들의 삶터였다. 거지들이 청계천 다리 밑에 토막(土幕)이라는 움집을 짓고, 거리를 떠돌아다니며 걸식을 하기도 하였으며, 생계를 찾아 서울로 올라온 사람들이 천변을 따라 길게 판자집을 짓고 살기도 하였다.
이처럼 청계천은 단순한 하천이 아니었다. 여기에는 600년 서울의 역사, 서울사람들의 생활이 흐르는 역사와 문화의 공간이었다.